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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 목사 / 마태복음 6:19-34 음성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장 19-34절)
인생을 살아가며 ‘염려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요즘 현대인은 ‘염려의 질병’에 걸려 고생하며 살아갑니다.문명이 발달할수록 염려의 비중은 커지고,
염려가 남긴 후유증은 큽니다. 이 염려로 병든 사회, 염려로 병든 영혼과 몸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찾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염려라는 단어가 6번 나오는데, 이 염려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그 중 하나는 ‘염려는 불필요하다’입니다(마 6:27). ‘아서 랭크’라는 사업가가 ‘월요일 염려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사업을 하며 매일 매일 염려에 붙잡혀 사느니 차라리 일주일에 하루만 염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염려가 생길 때마다 메모지에 적어 염려상자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메모지에 써 상자에
넣을 때는 큰 염려거리였는데, 지나간 일주일의 대부분의 염려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아서 랭크’는 수요일 염려 상자를 통해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염려했던 것들이 진전되면서 정리된 것이 있습니다.“염려는 하는 것이 아니다. 염려할 이유마저도 사라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염려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염려는 떠라가라!” 아멘!! 두 가지 개념 중 또 다른 것은 ‘염려는 해로운 것이다’입니다. 염려는 사람의 목을 꽉 물어 숨을 틀어막고 힘과 기능을 상실하게 합니다.
결국 염려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이 염려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기력증에 걸리는 예가 많습니다(눅 21:34). 둔하여진다는 것은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감각을 상실하고, 무력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영적 무기력증에 걸린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염려에 시달립니까? 맘몬, 즉 재물이라는 우상에 붙잡혀 섬기는 사람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그 무엇에 붙잡혀 노예가 되어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재물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염려를 선택할 것인가? 즉 맘몬우상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신앙은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은 선택하기만 하면 염려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하나님이 책임지고 기르신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를 얼마나 잘 보살펴주시겠습니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는 보배롭게 여긴다.
나는 너를 귀하게 여기신다.”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커야하고, 더 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우시고 계신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마 6:33下).
우리에게 더하시는 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참 평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굉장한 부자를 모시고 사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천국입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이미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이 우리 삶의 평생의 말씀으로 살아 역사하셔서 하나님 자녀에게만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아무 염려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메시지]
현대인은 염려의 질병에 걸려 있습니다. 마치 하루라도 염려하지 않으면 내일의 소망이 없어질 것처럼 안절부절 염려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염려가 사람의 ‘키’를 한 자라도 크게 하지 않는다.
염려가 우리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시키지 않는다고 분명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재물에 관한 사람의 염려가 얼마나 대단한지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재물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재물(마모나)를 의인화 시켜 재물신(맘몬)으로 섬길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 말씀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양자택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재물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물론 넉넉한 재물은 우리 삶의 편안함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재물 때문에 행복해 질수는 분명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성경의 말씀대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성취될 것입니다.